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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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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모건은 1635년경 웨일스에서 태어난 사략선이자 자메이카의 부총독이었다. 그는 1660년대 초 크리스토퍼 밍스의 사략선단에서 활동하며 경력을 시작했으며, 1660년대 후반에는 푸에르토 델 프린시페, 포르토벨로, 마라카이보 호를 습격했다. 1670년 파나마를 공격한 후 체포되었지만 기사 작위를 받고 자메이카 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모건은 자메이카 의회와 갈등을 겪었으며, 프랑스와의 관계, 해적 소탕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세 개의 농장을 소유하며 노예를 부렸고, 1688년 사망했다. 헨리 모건은 알렉상드르 엑스케멜린의 저서에 의해 악명 높은 해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일부 자메이카인과 영국인들에게는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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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모건
기본 정보
피터 레리 풍의 초상화 (1680년 작)
피터 레리 풍의 초상화 (1680년 작)
출생1635년경
출생지잉글랜드 왕국 웨일스의 몽머스셔 Llanrumney 또는 Pencarn
사망1688년 8월 25일
사망지자메이카 Lawrencefield
다른 이름Harri Morgan (웨일스어)
경력
소속잉글랜드 왕국
복무 기간1663년-1671년
이후 활동자메이카 부총독
활동
주요 활동해적
정치인
관련 전쟁영서 전쟁 (1654년-1660년)
상관크리스토퍼 밍스
후원자토마스 모디포드
관련 인물
전기 작가알렉상드르 에스케멜란

2. 초기 생애

헨리 모건은 1635년경 웨일스의 란럼니(Llanrumney) 또는 펜카른(Pencarn, 현재 카디프와 뉴포트 사이 지역)에서 태어났다.[1] 그의 초기 생애와 카리브해로 오게 된 경위는 불분명하다.[2] 훗날 모건은 학교를 일찍 그만두고 "책보다 창에 훨씬 더 익숙했다"고 말했다.[2]

모건이 카리브해로 간 경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654년 올리버 크롬웰의 서인도 제도 원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3] 또는 이민 비용을 대가로 3년 동안 식기 제작자의 견습생으로 일하며 카리브해로 이주했을 수도 있다.[4] 1670년 모건의 부하 외과 의사였던 리처드 브라운은 모건이 1655년 잉글랜드의 자메이카 점령 직후 개인적으로 현지를 방문했거나,[2] 브리스톨에서 유괴되어 바베이도스로 이송되어 하인으로 팔렸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5]

17세기 카리브해는 젊은이들이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지만, 설탕 수출 경제에서 큰 수익을 얻으려면 상당한 투자가 필요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스페인 제국과의 무역이나 약탈을 통해 재정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2] 당시 약탈은 정부가 허가한 사략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6]

3. 사략선 경력

사략선단을 이끈 영국 해군 장교 크리스토퍼 밍스


1660년대 초, 헨리 모건은 크리스토퍼 밍스가 이끄는 사략선단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1663년에는 밍스 선단의 선장 중 한 명으로 산티아고데쿠바와 캄페체 습격 및 약탈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3]

1664년, 자메이카 총독 토머스 모디포드는 사략선 활동을 규제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철회해야 했다.[4] 당시 자메이카는 5,000명 정도의 소규모 식민지였고, 사략선 수입은 경제 파탄을 피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4] 사략선은 특정 국가 선박 공격 및 압류 허가인 사략 면허를 부여받았으며, 전리품 일부는 군주 또는 면허 발행자에게 돌아갔다.[9]

1665년 8월, 모건은 존 모리스 등과 함께 귀중품을 싣고 포트 로열로 귀환했다. 모디포드는 "중앙 아메리카는 스페인령 인도 제도 공격에 가장 적합하다"고 보고했다.[5][6] 1666년 초, 모건은 에드워드 모건의 딸 메리와 결혼하여 자메이카 상류층과 교류하게 되었다.[6]

1664년,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적대 관계로 전환하며 식민지 총독에게 네덜란드 상대 사략 면허 발행 권한을 부여했다.[7] 많은 사략선은 이 면허를 받지 않았지만, 모건의 장인은 신트외스타티위스 섬 원정에서 전사했다.[8]

1666년 모건의 활동은 자료에 따라 다르다.[10] H. R. 앨런은 Edward Mansvelt영어의 부관으로 추정했지만, 다른 자료에는 포트 로열 민병대 지휘 및 Fort Charles (Jamaica)영어 건설 기록도 있다.[11][12][13][14] 이 무렵 모건은 자메이카에 농장을 구입했다.[15]

3. 1. 초기 활동 (1660년대 초 - 1667년)



1660년대 초, 헨리 모건은 크리스토퍼 밍스 경의 지휘 아래 카리브해와 중앙 아메리카의 스페인 정착지를 공격하는 사략선 활동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1] 1663년에는 쿠바산티아고데쿠바와 유카탄 반도의 캄페체 약탈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3]

1664년, 자메이카 총독 토머스 모디포드 경은 사략선 활동을 제한하려 했으나, 경제적 현실 때문에 정책을 철회해야 했다.[4] 당시 자메이카는 5,000명 정도의 소규모 식민지로,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1,500명에 달하는 사략선원들이 가져오는 수입이 필수적이었다.[4]

1665년 8월, 모건은 동료 선장 존 모리스, 야콥 파크만과 함께 많은 귀중품을 싣고 포트 로열로 돌아왔다.[5][6] 1666년 초, 모건은 포트 로열에서 자메이카 부총독 에드워드 모건의 딸 메리 모건과 결혼하여 자메이카 상류층과 교류하게 되었다.[6]

1664년, 잉글랜드네덜란드 간의 적대 행위(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로 인해 식민지 총독들은 네덜란드에 대한 사략 면허를 발행할 권한을 받았다.[7] 모건의 장인 에드워드 모건은 신트외스타티위스 섬 원정 중 사망했다.[8]

3. 2. 푸에르토 델 프린시페 습격 (1668년)

Puerto del Príncipe영어 습격은 1668년에 있었다. 1667년, 잉글랜드스페인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면서 자메이카에서는 스페인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토머스 모디포드는 사략선에게 스페인 공격을 허가하는 동시에 헨리 모건에게 사략선을 이끌고 스페인인을 포로로 잡으라는 사략 면장을 발행했다. 모디포드는 이 행위를 통해 스페인에 의한 자메이카 공격의 가능성을 자신들이 우려하고 있음을 나타내려는 목적이 있었다.

모건은 제독의 지위를 받고 1668년 1월, 이 임무를 위해 10척의 배와 500명의 병사를 모았다. 그 후 해적(버커니어)의 섬으로 알려진 토르투가 섬에서 2척의 배와 200명의 병사가 추가로 합류했다.[1][2]

모건의 사략선은 해상에서의 스페인 선박에 대한 공격은 허가되었지만, 육지에 대한 공격은 허가되지 않았다. 약탈로 얻은 전리품은 정부와 사략선의 선주에게 분배되는 계약이었지만, 만약 공무에서 벗어나 도시를 습격했을 경우, 거기서 얻어진 전리품은 모두 사략선의 소유가 되었다. 로고진스키는 "도시에 대한 공격은 불법 해적 행위였지만, 매우 유익했다"고 말했지만,[1] 자헤디는 모건이 스페인에 의한 공격의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도시에 대한 공격은 그의 임무 범위 내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3]

초기 계획에서는 아바나를 공격할 예정이었지만, 그곳의 방어력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약 80.47km 내륙의 도시 푸에르토 프린시페(현재의 카마구에이)로 목표를 변경했다. 모건 등은 점령에 성공했지만, 얻은 전리품은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4][5] 모건의 부하였던 Alexandre Exquemelin영어의 기록에 따르면, 전리품의 적음에 모두 분개하거나 비탄에 잠겼다고 한다.[6] 모건은 프린시페 공략을 모디포드에게 보고함과 동시에, "70명의 병사가 자메이카로 향하고 있으며, 베라크루스와 캄페치, 포르토벨로와 카르타헤나에서 상당한 병력이 쿠바의 산티아고에서 합류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스페인이 잉글랜드 영토에 대한 공격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했다.[7]

작전 종료 후, 사략선원들끼리 다툼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두 명의 선원이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잉글랜드인이 프랑스인을 뒤에서 찔러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대로는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날 상황에서, 모건은 이 잉글랜드인을 체포하고, 프랑스인 선원들에게는 포트 로열 귀환 후 범인을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모건은 이를 지켜 이 선원은 교수형에 처해졌다.[8]

3. 3. 포르토 벨로 습격 (1668년)

푸에르토 델 프린시페 정복에 성공한 후, 모건은 스페인 제국에서 세 번째로 중요한 도시였던 포르토벨로(현재의 파나마 포르토벨로) 공격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포르토벨로는 스페인 함대가 신대륙에서 약탈한 은을 본국으로 수송하기 전에 보관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졌다.[1]

1668년 7월 11일, 모건은 500명의 병력과 함께 포르토벨로에서 약 48.28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다. 밤중에 세 개의 성을 향해 진군하여, 빠른 기습으로 모두 점령하고 도시에 입성했다.[1] 사략선 측의 피해는 18명 사망, 32명 부상으로, 모건의 군사적 지휘 능력이 다시 한번 과시되었다.[1]

알렉상드르 엑스케멜린의 기록에 따르면, 모건은 포로로 잡은 수녀와 수사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여 성벽을 공격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엑스케멜린의 초판에만 기록되었고, 이후 판본에서는 삭제되어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1]

모건은 도시를 점령한 후, 파나마 임시 대통령에게 도시의 몸값으로 100000PES를 요구했다. 주민들이 고문을 당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 결국 100000PES의 몸값이 지불되었고, 모건은 70000GBP~100000GBP의 돈과 귀중품을 가지고 포트 로열로 귀환했다.[1]

3. 4. 마라카이보 호 습격 (1668-1669년)

1668년 10월, 모건은 10척의 배와 8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드바슈(Île-à-Vache)로 항해하여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669년 1월 2일, 그의 기함 옥스퍼드 호가 폭발하는 사고로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1] 이 사고로 인해 모건은 카르타헤나 공격 계획을 변경하여 마라카이보와 히브랄타르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

모건 함대는 먼저 산 카를로스 데 라 바라 요새를 점령한 후, 마라카이보와 히브랄타르를 약탈했다.[1] 이후 스페인 방어 전대인 아르마다 데 바를로벤토(Armada de Barlovento)와 대치했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화공선 작전을 통해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1]

마지막으로 마라카이보 시민들과 협상을 벌여 2만 페소와 소 500마리를 지불받기로 합의했다.[1] 모건은 총 와 상품, 노예를 획득하고 포트 로열로 귀환했다.[1]

3. 5. 파나마 습격 (1669-1671년)

1669년, 스페인의 여왕 섭정 마리아나는 카리브 해에서 영국 선박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2] 1670년 3월, 스페인 사략선은 영국 무역선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이에 토머스 모디포드 자메이카 총독은 모건에게 "섬의 보존과 평화를 위해 ... 적에게 전쟁을 일으키고, 그들의 배를 불태우고 파괴하며, 그들이 상륙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업적을 수행"하도록 위임했다.[3]

1670년 12월, 모건은 30척 이상의 영국 및 프랑스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스페인 본토로 항해했다. 그는 먼저 올드 프로비덴시아와 산타 카탈리나 섬을 점령한 후, 차그레스와 산 로렌소 요새를 점령했다. 1671년 1월 9일, 모건은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차그레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파나마 비에호로 향했다.

1671년 1월 27일, 파나마 비에호에 도착한 모건은 다음 날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약 1,200명의 스페인 보병과 400명의 기병대로 구성된 수비대와 맞섰다. 모건은 먼저 그의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숲을 통해 우회 공격을 하고, 다른 한 부대는 평야를 가로질러 정면 공격을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 전략은 성공하여 스페인 군대를 격파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파나마 총독은 도시를 방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사망했다. 모건의 사략선들은 3주 동안 파나마에 머물면서 도시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고문하여 숨겨진 재산을 찾았다. 이 과정은 모건의 부관인 에드워드 콜리어가 감독했다. 역사가들은 모건이 "정복당한 적에게 충분히 고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약탈품의 총 가치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모건은 15만 파운드라고 주장했지만, 스페인 측은 40만 파운드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1671년 3월 12일, 모건과 그의 부하들은 많은 전리품과 포로들을 싣고 포트 로열로 귀환했다.

4. 노예 농장

1670년대와 1680년대에 헨리 모건은 세 개의 대규모 농장을 소유했다. 그는 후안 데 세라스가 이끄는 자메이카 마룬에 대항하는 세 차례의 원정을 지휘했다. 모건은 마룬족을 블루 마운틴 깊숙이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데 세라스를 체포하거나 도망친 노예들의 공동체를 완전히 진압하지는 못했다.[1]

모건은 사망 당시 많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유언은 1689년에 검인되었는데, 사망 당시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131명의 아프리카인 노예 (남성 64명, 여성 67명, 어린이 33명)를 소유했으며, 그 가치는 1923GBP였다.[2] 그는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아내에게 평생 동안 상속했고, 아내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토지와 노예 대부분이 그의 조카에게 넘어갔다. 모건은 또한 그의 친구인 로저 엘레트슨에게 세인트 메리 교구에 있는 토지 일부를 남겼다.[2]

5. 죽음과 유산

모건은 1688년 8월 25일 자메이카 포트 마리아에 있는 로렌스필드 에스테이트에서 사망했다.[4] 알버말은 국장을 명령했고, 대중이 조문할 수 있도록 모건의 시신을 킹스 하우스에 안치했다. 해적과 사략선들이 체포될 염려 없이 조문할 수 있도록 사면령이 선포되었다. 그는 포트 로열의 팔리사도스 묘지에 매장되었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함선에서 22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모건은 사망 당시 부유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개인 재산은 5263GBP로 평가되었다.

그의 유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그의 농장과 노예를 아내 메리 엘리자베스에게 남겼지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망하면 그의 재산은 처남인 바인들로스의 자녀, 즉 조카에게 넘어가도록 했다. 1688년 6월 17일에 서명된 그의 유언에서 모건은 그의 대자 찰스 바인들로스와 헨리 아치볼드에게 모건의 성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그의 자메이카 재산을 남겼다. 이들은 그의 두 사촌 안나 페트로닐라 바인들로스와 요한나 아치볼드의 자녀였다. 그는 여동생 캐서린 로이드에게 그의 재산에서 연간 60파운드를 "트레데가르의 나의 언제나 정직한 사촌 토마스 모건의 손에 지급"하도록 했다.

1692년 6월 7일, 지진이 포트 로열을 강타했다. 도시의 약 3분의 2, 즉 33에이커(13ha)가 주 진동 직후 킹스턴 항구로 침몰했다. 모건의 무덤을 포함한 팔리사도스 묘지는 도시와 함께 바다로 가라앉은 부분 중 하나였다. 그의 시신은 그 이후로 발견되지 않았다.

6. 유산

알렉상드르 엑스케멜린의 『De Americaensche Zee-Roovers』(1678)는 역사가들의 헨리 모건에 대한 시각에 큰 영향을 미쳤다.[1] 로고진스키는 엑스케멜린의 책 때문에 모건이 "가장 잘 알려진 해적"일 것이라고 말한다.[2] 코딩리는 엑스케멜린이 파나마에서 모건이 약탈한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건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를 잔인하고 파렴치한 악당으로 묘사"했으며,[3] 이는 후에 역사가들의 모건에 대한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4][5] 앨런은 엑스케멜린의 영향 등으로 인해, 모건은 역사가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말하며, 찰스 레슬리의 『자메이카 신사』(1739), 앨런 가드너의 『자메이카 역사』(1873), 허버트 뱅크로프트의 『중앙 아메리카 역사』(1883) 및 하워드 파일의 저서 『하워드 파일의 해적 이야기』(1921년에 편집) 등에서 모건이 런던, 감옥 또는 런던 타워에서 사망했다고 잘못 기록한 역사가들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6]

라파엘 사바티니의 1922년 소설 『캡틴 블러드』는 모건의 경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엑스케멜린은 모건의 부하들이 점령한 여러 마을에서 광범위한 고문을 자행했다고 썼다. 스티븐 스넬더스에 따르면, 스페인 측의 보고서는 모건의 습격이 포르토 벨로 또는 지브롤터 주민들에게 고문을 가한 것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파나마에서는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신뢰할 만한 보고가 있다.[7] 역사가 패트릭 프린글은 고문이 현대인의 눈에는 잔혹하고 무자비해 보이지만, 당시 많은 유럽 국가에서 사법 심문의 일부로 용인되었다고 말한다.[8] 모건은 항상 자메이카 총독의 위임을 받아 싸웠고, 자메이카를 방어하기 위한 영국 정부의 예비 해군력 역할을 했다.[9][10] 스페인은 사략을 합법적인 활동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이 사략 면허를 가지고 있더라도 모건을 해적으로 간주했고, 모건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11][12]

로고진스키는 모건이 다른 해적들만큼 후기 픽션 작품에 많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십과 이기적인 배신이 혼합된 모호함" 때문이지만,[13] 그의 이름과 인물은 라파엘 사바티니의 1922년 소설 『캡틴 블러드』와 존 스타인벡의 첫 소설 『황금 잔』(1929)을 포함한 문학 작품에 등장하며, 두 작품 모두 모건의 경력을 크게 기반으로 하고 있다.[14][15] 모건과 숨겨진 보물에 대한 이야기는 이언 플레밍의 1954년 소설 『위험한 질주』[16]존 메이스필드의 1920년 시 "캡틴 스트래튼의 환상"을 포함한 다른 작품에서도 어느 정도 등장한다.[17] 그의 삶을 스크린으로 재현한 작품으로는 『캡틴 블러드』(1935), 『흑조』(1942),[18] 『흑해적』(1952), 『해적 모건』(1961), 『토르투가의 해적』(1961), 『흑해적』(1976)이 있다.[19] 모건은 또한 『시드 마이어의 해적!』과 『에이지 오브 파이어리츠 2: 버려진 도시』를 포함한 여러 비디오 게임에도 등장했다.

1944년 시그램 컴퍼니는 사략선의 이름을 따서 캡틴 모건 브랜드의 럼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2001년 캡틴 모건 브랜드는 런던에 본사를 둔 다국적 음료 회사인 디아지오에 매각되었다. 모건의 이름은 클라렌던의 모건의 다리, 모건의 패스, 모건의 계곡, 킹스턴의 모건스 하버 호텔 앤 비치 클럽, 온두라스 로아탄에 위치한 호텔 헨리 모건, 아이티에 위치한 포트 모건 리조트, 벨리즈 앰버그리스 키에 있는 캡틴 모건의 리트리트 앤 바케이션 클럽 등 카리브해 지역의 여러 장소에 붙여졌다.

경제학자 피터 리슨은 해적과 사략선들이 일반적으로 현대의 낭만적인 시각과는 달리 살인적인 강도와는 거리가 먼 수완이 좋은 사업가였다고 믿는다. 인류학자 앤 M. 갈빈과 역사가 크리스 레인은 모건이 토지 귀족에 진입하기 위해 부를 추구했다고 본다. 갈빈은 모건이 "무법 행위, 정치적 책략, 비즈니스 수완을 통한 사회적 이동성"을 추구했다고 썼다. 『아메리카 내셔널 바이오그래피』에 기고한 글렌 블라록은 모건이 해적으로서의 활약과 대영 제국을 위해 자메이카를 방어한 공로로 많은 자메이카인과 영국인들의 영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자메이카인들은 모건을 노예 제도를 유지하려 했던 "범죄 해적"으로 본다.

토마스는 모건을 "용기, 결단력, 용맹함, 그리고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계획가였고, 훌륭한 군사 전략가였으며, 왕, 잉글랜드, 그리고 자메이카에 지극히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많은 형제단과는 달리, 그는 유연하고 적응력이 뛰어나 자메이카의 미래가 약탈이 아닌 평화로운 무역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그의 시대의 어떤 총독보다도 더 오래 직을 역임했다."라고 묘사한다.

참조

[1] 뉴스 The Tatler https://www.britishn[...] The Tatler 1941-04-23
[2] 간행물 Calendar of State Papers Colonial, America and West Indies: Volume 11, 1681–1685 https://www.british-[...] Her Majesty's Stationery Office 1898-06-13
[3] 간행물 Calendar of State Papers Colonial, America and West Indies: Volume 11, 1681–1685 https://www.british-[...] 1681-06-13
[4] 웹사이트 Sir Henry Morgan https://www.oxfordre[...] Oxford Reference 2022-01-29
[5] 백과사전 헨리 모건 (Henry Morgan) https://100.daum.net[...] 다음백과
[6] 서적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7] 서적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8] 백과사전 자메이카의 역사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9] 백과사전 식민 시대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2001-09-20
[10] 서적 Under the Black Flag: The Romance and Reality of Life Among the Pirates https://archive.org/[...] Random House 2006
[11]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018
[12] 서적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13] 서적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14] 서적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15] 백과사전 파나마시티 [Panama City]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16] 서적 해적의 세계사 AK커뮤니케이션즈 2018
[17] 서적 해적의 역사 가람기획 2003
[18] 서적 제국 Empire 민음사 2006
[19] 서적 제국 Empire 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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